서정주
선운사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서정주 시인(1915. 5.18 – 2000. 12. 24)은?
본관은 달성, 호는 미당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
생
주의에 빠져듦
"가난하고 불행한 이때 이 나라의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균배(均配)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가죽구두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의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하숙도 학교 근처의 좋은 집에서 빈민촌으로 옮겨 가난한 사람
여행을 다녀왔다.
1935년 박한영 대종사의 권유로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했으나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김광균·김달진·김동인·오장환·함형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역임하였다.
1940년 고
미당서정주 신선집』등이 있다. 초기에는 강렬한 생명력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1960년대 이후 동양적 전통의 신비주의 경향에 경도되었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씼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주의 시는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강한 지향성을 뼈대로 삼았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그는 죽음, 곧 백골의 차원에 이르는 것으로 그의 시를 마무리짓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白骨 몰래/아름다운 또다른 故鄕에 가자”라고 노래부르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이 액면 그
2. 기형도의 시세계
기형도의 시는 세계의 어두운 부분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시 안에 어두움과 절망을 심음으로 시를 읽는 사람도 침묵으로 이끄는, 하지만 그 안에서 세상에 대한 비판과 공유할 수 있는 절망으로 가득 찬 기형도의 시는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기형도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서정주의 또는 생명의식으로 회귀하는 경향도 함께 형성되었다. 서정주의 또는 생명의식으로의 회귀에는 기존의 청록파 시인과 같이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고, 문학을 사회 변동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와 시문학의 본질적 영역에 대한 탐구가 함께 존재한다.
본고는 이러한 1960
문교부 예술과장, 한국문학가 협회 최고 위원(‘56~’60), 한국 문인 협회장(‘77)을 맡았다.
1977년 11월에 제1차 세계여행길에 오르고, 1984년 제2차 세계여행을 부인과 함께 다녀온다. 2000년도 10월에는 부인 방옥숙 여사가 별세하고, 12월 25일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가 숙환으로 별세한다.
Ⅰ. 서 론
서정주는 시 활동을 시작하는 1936년 11월에 '시인부락'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다. 따라서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시인부락' 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듯 하다.
『시인부락』은 시문학파의 기교적인 예술지상주의와 주지주의파의 비생명적인 과학성을 다같이 거부하고, 인간탐구를 지
서정주 徐廷柱 1915 - 시인. 호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출생/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 수업. 전북 부안군 졸포보통학교 수료.서울 중앙고보 및 전북 고창고보 중퇴.방랑생활. 1931년 고승 박한영 대종사 문하에 입산,서울 개운사 대원암의 중앙 불교 전문강원에 입학, 그 뒤 중안